올해 마지막 절기 ‘동지’가 돌아왔네요.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연말 분위기는 확실히 조금 더 들뜬 모습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어디로 열심히 가고 있는 걸까요. 점점 더 추워지는 겨울날 온기가 서로가 서로에게 가닿아 따뜻한 연말을 보내길 바랄게요. 
한 해 끝에 찾아오는 절기 동지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낮의 해가 일찍 저물어 버리는 것이 아쉽지만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좋아하는 책을 보다가 졸기도 하는 나른한 겨울밤도 참 편안한 시간이지요. 이불을 돌돌 말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재밌는 일들을 찾아봐야겠어요.

지난해 구구절기 동지 편에서는 직접 가마솥에 팥을 삶아 만든 팥죽과 팥빙수 맛집을 소개했는데요. 이번 동지에는 연말을 맞이해서 지인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내온 과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마 이 글의 끝에서는 따끈한 팥죽을 한 그릇 비우고 속이 뜨끈해지는 것처럼 구독자 님의 마음도 어느새 따뜻해져 있지 않을까 해요.

어느 날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좋은 취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러 가면 좋겠다! 라고 넌지시 말을 꺼냈어요. 사실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다른 한 친구는 이 말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었나 봅니다. 며칠이 지난 뒤 이 친구는 봉사활동에 대해서 관련 기관과 상의 후 일정과 계획을 모두 기획했고 어느새 그 일정들이 하나씩 시작되어 모두가 그 계획대로 참여하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구구절기의 멋쟁이 아르마딜로입니다. 이번 절기는 밤이 가장 긴 동지입니다. 하지를 지나면 해가 점점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다가 동지에 이르러 절정을 찍습니다. 동지에 밤이 가장 길다는 건 달리 말하면 앞으로 밤이 점점 짧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동지는 작은설이라 불리며 태양의 부활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구구절기에서 이 이야기를 해도 될까 엄청 고민했습니다만 조심스럽게 시국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지난 3일 설거지를 하고 있던 제게 계엄 소식을 알린 것은 구구절기 멤버들이었습니다. 4일 새벽은 뉴스 라이브와 SNS를 번갈아 보며 뜬눈으로 지새다 해가 뜨고서야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벌써 2주가 훌쩍 지났네요. 저는 그 사이 국회에 한 번, 광화문에 한 번 갔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남태령을 지켜보며 문장을 몇 번씩 고치고 있습니다. 많은 절망 앞에 그럼에도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만 늘 밤은 너무나 기네요.

구독자 님은 긴 겨울밤에 상처입지 않았나요? 구독자 님에게 싸울 힘을 주는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후론 화요일만 기다려요. 동네에 군고구마 트럭이 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군고구마와 군밤 모두 한 봉지에 오천 원이에요. 봉투 크기는 다르고요. 같은 한 봉투여도 고구마 알이 큰 날은 두어 개 들어 있고, 작은 날은 예닐곱 개도 들어 있어요. 처음에는 고구마와 밤을 섞어 오천 원어치를 샀습니다. 그다음엔 군고구마 한 봉지, 군밤 한 봉지를 샀어요. 가끔은 군고구마 오천 원어치와 군밤 만 원어치를 삽니다. 지난 화요일, 한 주간의 기대가 무너졌어요. 아저씨가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 오천 원어치를 사려고 마음먹고, 잊을까 봐 달력에도 적어 놓았더랬죠. 내 정신머리를 믿지 못해 몇 번이고 일정을 확인하면서도, 아저씨의 부재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늦으시나 해서 몇 번 다시 나가 봐도 역시나 쓸쓸한 골목길만 있었어요. 아아 내 눈을 믿고 싶지 않아, 하며 눈을 꾸욱 감았다 떠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오시지 못한 걸까요, 오시지 않은 걸까요? 오늘 고구마와 밤 상태가 별로라 오지 못하신 걸까요? 아침에 시동을 걸려고 보니 차 상태가 안 좋았던 걸까요? 설마 편찮으신 건 아니겠죠? 혹시 이 동네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이상한 사람이 괴롭혀서 다시는 오시지 않기로 정하신 걸까요? 누가 여기에 트럭을 세워 놓지 말라고 한 건 아닐까요? 그래서 조금 다른 곳에 자리를 잡으셨는데 내가 모르는 건 아닐까요? 요일을 착각하셨을까요? 이 동네 매출이 너무 안 좋아서 더 잘 팔리는 다른 동네로 가셨을까요? 아무 안 좋은 일 없이, 여기 다시 안 오기로 결정된 것 없이 이번만 편하게 쉬기로 하신 거면 좋겠습니다.

어느 화요일의 대사건 이후 당연히 함께 할 거라 기대했던 것들 없이 보내야 하는 동지의 긴긴밤이지만, 곧 아침이 오고 며칠 더 기다리면 다음 화요일도 오겠지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화요일일지, 충격적인 지난 화요일의 연속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날 골목길에 구수하고 달달한 냄새가 퍼진다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은 날이어도 저는 이미 그 따뜻하고 달콤하고 보드라운 맛을 잊지 못하니까요. 시간을 들이고 조금 더 멀리 가더라도, 정 안 되면 직접 구워서라도 종종 먹게 되지 않을까요? 겨우내 조금 번거롭더라도 군고구마와 군밤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고 싶어요. 이 작은 마음, 세상을 밝히는 작은 불빛들이 영영 살아 있기를 바라며 새해를 기다립니다.